아카기 류노스케는 이 난이 웃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에스퍼니 뭐니, 농담 삼아서 떠들고 다니지만 사실 그 자신은 타인을 향한 몰이해를 충분히 고려하고 이해하며, 강요하지 않는 자였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성을 해치는 일이니까. 타인에게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 아카기 류노스케는 이러한 행위를 제3의 살해, 그러니까 '정서적 살해'라고 규명했다. 껍데기에 불과한 삶은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사회적 죽음의 다른 형태이자, 간혹 육체적 죽음보다 끔찍하게 다가오고는 한다. 아카기 류노스케의 심장부는 바로 그 정서적 살해를 향한 견해로부터 비롯되어 가지를 뻗는다.
그러므로 아카기 류노스케에게 사유보다 상위의 개념, 그러니까 '의지'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지이다.
아카기 류노스케가 믿는 가능성은 AI라는 몸체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귀속할 수 없는 영적인 것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의지라는 철학적 개념 아래 인간은 영원할 수 있다 믿었다. 가상의 것에 푹 빠져있었던 영향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의지라는 것 없이 평가를 그대로 수용하며 남들에게 떠밀리고 비난을 감수하며 살아온 생애를 더는 인정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카기 류노스케는 완전히 AI를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으나 화려하게 망해먹었다. 낙담 속에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고 부정하다가도 긍정하기를 반복, 후회를 쌓아오며 아무것도 없었던 생애를 돌이켜 보자 죽기 전보다 더욱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카기 류노스케의 믿음은 바로 경험에 있었다. 그렇기에 가능성을 부정하고자 입을 열었으나, 이내 다물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난제의 답은 끊임없이 당신이 생각해야 하며, 자신이 납득해야 한다. 타인의 답지를 모방한다고 이해되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사상을 내세우는 것은 그 본질을 흐리게 만들 뿐이다. 다만 당신이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간단하다, 당신이 친구라는 이름을 나에게 붙여주지 않았던가.
응, 앞으로의 삶을 괴로움 속에서 보내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할까요.
아카기 류노스케는 미신을 믿지 않으나 약속은 중요시했다. 자신의 언어에 책임을 지고 거짓됨 없이 살아가고자 했다. 거짓말보다 침묵이 익숙했으나, 빈말로 상처 입히는 것이 사실을 명시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속일 자신이 없어 한없이 솔직하고 투명해진다. 타인이 약속을 어겨도 괜찮다, 하지만 자신만큼은 어기지 않으려고 했다. 타인을 향한 약속은 자신을 향한 약속이기도 했다. 또한 소망을 담기도 했다. 이번에는 전적으로 후자였다.
누구라도 죽음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동시에 후회와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귀천이 없다는 말 또한 동의한다. 목숨에 가치를 만드는 건 바로 자신이니까. 위업과 무관하게, 가치는 본인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누나의 사상이 주입된 것이어서 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당신이 물어보았다면, 아카기 류노스케는 기꺼이 동화된 사상 또한 당신의 것이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분별할 수 없으나 마음이 이끌고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사상이 될 수 있다. 모방에 불과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면 사람은 한없이 선해질 수 있다. 아카기 류노스케는 인간의 천성과 변화를 동시에 믿는 자였다. 변하지 않는 가치와, 변하기에 아름다운 가치. 모든 것을 믿었다.
난 씨는 어떤가요? 자신을 AI로 생각하더라도, 생존본능이 여전하다면 저는 여기에서 벌어진 죽음을 외면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AI가 아닌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고, 그렇게 여긴다면 저 또한 당신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도 괜찮다고 말해드릴게요. 입력된 것이면 어때요, 입력된 것이 존재의 숙명이라면 우리는 삶을 허락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거 아닐까요?
당신이 AI로 남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많이 외로울 것 같아서요.
안 그런가? 쓸쓸함은 누구에게나 있다. 가식을 떨며 사람을 통해 해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면의 호소를 통해 해소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아카기 류노스케는 어느 쪽인지를 묻는다면, 당신이면 충분하다고 답하겠다. 선천적으로 사람을 기피하면서 모순적이게도 타인을 통해 활력을 얻는 자라고 말하겠다. 그러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가식을 떨지는 않는다. 그것을 통해 얻은 인간관계로는 여전히 자신은 궁핍할 것이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난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쓸쓸함조차 느끼지 않는가, 혹은 외면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 순간을 헤쳐 나가는가? 혹은, 무력하게 쓸려가는가? 무수히 많은 가정은 무의미하다.
게임성 도박이라, … 실패가 곧 좌절이 될 필요는 없지, 우리는 그것을 기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결말을 정하는 힘 또한 전능한 신 아닌 우리에게 있지. 결말에 대해서 신도 감히 우리를 농락할 수 없을 거야, 믿음이란 그런 거니까. 믿음은 반드시 보답받을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믿자. 우리가 그렇게 만들자.
할 수 있어, 혼자가 아니니까.
무모하더라도, 같잖은 희망론이 될지라도, 우리의 결말은 분명 해피 엔딩일 것이라고─ 그렇게 선언한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허무했다고 해야 할까, 인류에게 질렸다고 해야 할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감정을 쏟을 정신도 없었으니까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에 여유가 나더라도 감정을 쏟아낼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숨을 쉬는 것이 전부인. 삶이라기에는 끝도 없이 비어있던 인생. 본능처럼 사람을 갈구해도 군중 속에 외로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을 향한 모든 정이 두려웠다. 계절 단위 이하로 만나고 떠나기를 반복할지언정 최대한 가벼운 인간관계만을 추구하고 그마저도 벽을 세우며, 제 안의 사람이라고 포용해도 타인이라고 벽을 치고 살아오기를 반복. 자신에 대한 것을 마지막에 끊어낸 것도 결국 타의에 의해 떠밀렸을 뿐인. 타인을 진심으로 위하지 않지만 동시에 이기적이지도 않은. 모순을 떠안은 생애. 그러니 유일했다는 결론에 쉽게 답할 수 없어져서.
다들 원했으니까…,
그러니까, 떠밀려서.
타인이 아닌 군중에 의해 쉽게도 휩쓸렸다고 그렇게 고해한다. 아니, 고해라는 말은 지나치게 무겁고 또한 우습게 여겨진다. 이건 그저, 미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고백告白이다. 당신이 살아온 생애는 분명 의심할 여지없이 고결하지만 나는 당신을 신성시하지 않았으므로 종교적 의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백.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일을 생이 멎고 나서야 할 수 있다니, 세상에 다시없을 겁쟁이인 것이 분명하다. 되물었다.
이것 또한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인가요?
나의 도피처라고 말할 수 있나요?
외면하기 위한 유예인가요?
자신을 해독하는 것도 제법 버거운 일이다. 아니, 정정한다. 타인의 핵심을 꿰뚫는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것은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 생전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까닭이다. 이미 죽어 없어진 생애를 다시 더듬어 가면서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노력 따위에 파묻혀 이기적이게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이타심 또한 이기심의 일종이라고 세간에서는 말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월등한 불량품. 누가 나를 그렇게 표현했더라,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학우의 단어가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 인정하자. 태생적으로 정서적 결함을 가졌다. 그것이 사회성에 대한 학습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인격장애를 앓는 이들이나, 자폐 성향을 가지고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나의 격리는 명백하게 자의였다.
그러나, 자신을 격리하는 행위를 포기하고 지금 여기에 와서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도 늘었다. 후회하지 않을 미련 없는 삶이 아니라 후회하는 마음으로 적셔져 다행이라고 동시에 여기게 된다. 과분할 수준의 결여의 충족, 동시에 되돌려 달라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속인다. 드디어 미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참 성급하게도 죽음을 택해버려서. 절대 말할 수 없지만 곱씹을수록 후회가 더해질 뿐이라… 죽음을 되돌려 달라고, 이런 몸으로나마 살아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인간이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이유였다. 되돌아간다고 해도 바뀔 수 없는 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의 찬란한 재능과 자신 사이에 차마 극복할 수 없는 경계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살고 싶었어, 소중해졌으니까. 하지만 너희가 없는 인생에 과연 의미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 의미는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는 말했어, 차라리 다 같이 심해 속에서 침몰하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다고.
누군가는 말했어, 이 몸체를 이용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누군가는 말했어, 죽음을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고.
누군가는 말했어, 나는 분명 살고 싶어 했다고.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면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겠죠.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후회할 수 있으니까.
나의 생애에 의미를 만들어 준 주체는 당신을 포함한 여기 모든 사람들이니까. 나의 죽음이 숭고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나는 인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희생이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죽음은 도피의 수단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몇 번이고… 미련이 남을지라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괜찮다, 후회 없는 죽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삶이 소중해졌다는 말 또한 기꺼이 긍정했다. 응, 억지로 다시 만들어진 삶이라도 살아가고 싶어. 타인이 보기에 미련하고 볼품없게 보일지도 몰라, 그래도 살아갈 거야.
그것이 인생人生이니까.
사유는 곧 살아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며, 감정은 곧 사유하는 자들의 전유물이다. 그러니 알고리즘으로 입력될 수 없는 희로애락을 가진 자신을 감히 AI로 정의할 수는 없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모방에 불과하여 입력한 데이터베이스라는 말에 나는 기꺼이 부정하겠다. 몸체는 다시 만들어졌더라도 나의 삶은 인조적으로 주입된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모든 감각은 오로지 내 고유의 것이다. 재탄再誕이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나의 형태는 이미 끝이 맺어진 삶의 연장선이며, 다시 쟁취한 기회이다. 나는 이 삶을 다시는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의심을 반복하더라도, 참극을 눈에 온전히 담아야 하더라도.
엇나가지 않아. 확실하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의 이기심보다 상위에 있는 것은 여전히 도덕적 행위에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옳은 선택인지 끊임없이 고민했어. 윤리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회생한 나 자신을 어떻게 규명할지. … ……그러나 내가 도덕적 규범을 어긴다면 모방 이상의 것을 구현한 이 몸체를 기꺼이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욕심에 불과하지만 감정이 있는 한 나는 끝내 부정할 수 없다. 입력된 반응에도 쉬이 정 붙이고 슬퍼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살아온 생애를 긍정하며 나 자신을 더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통상적 도덕적 윤리에 반하더라도.
응, 이론은 자신 있어. 자료도 풍부하고. 특히 의학 지식에 대한 부분은… 인정하기 싫지만, 지하 1층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정보의 질만큼은 절대 무시할 수 없어. 여기에서 여러 방면으로 계속 활용되었겠지. 여전히 이런 몸이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 정확히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어느 부분에서 참고를 했는지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짓으로 잠시 문을 바라보기는 했으나, 다시 시선이 당신에게로 관성처럼 돌아왔다.
팔이 움직이고 감각이 있다면… 분명 재생될 거라고 생각해. 어디까지 ‘진짜 같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감각이 있다는 건 우선 신경세포라고 불릴만한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니까. 따라, 말했던 재생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만, 감각 자체가 마비되거나 아예 절단된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 추리를 본인이 직접 들었으면 무서워했을 것 같네… 그래서 절대 안정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가끔 거짓말도 하는 것일까?
애초에, 그런 환자를 상대라면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또한 가벼운 어투였다. 굳이 이러한 지론 따위의 것을 알려주며 상대를 겁주는 것보다는 시간에 따라 육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듯이 새로운 몸의 구성체계나, 원천, 에너지 자원이 되는 몸속 생체활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은가. 연료를 필요로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땅한 에너지를 수급할 수 있는 다른 충전식 기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잠수함 자체가 AI의 원동력일 극단적인 예시안 또한 나올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고실험을 잠시 거쳤다가, 본인 또한 어렵다는 말에 가만 시선을 맞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연다.
의심하는 행위 자체가 상대를 믿고자 하는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신뢰와 의심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아예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믿기 위해서 의심을 한다. 믿음 없이 이루어지는 의심은 더는 의심이 아니라 단순한 마녀사냥에 불과하니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편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타인을 의심하는 것은 타인을 믿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온다. 그러니 매 순간 우리는 타인을 믿기 위해서 이 힘든 의심을 계속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폭풍우 같은 파란이 지나가면.
恥の多い生涯を送ってきました。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自分には、人間の生活というものが、見当つかないのです。 ¹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까닭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은 죽음으로 삶의 이유를 만듭니다. 꽃은 멎기에 아름답고 빛의 산란은 찰나이기에 아름답습니다. 무릇 인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아름다움은 늘 가치를 잃습니다. 결코 깨지지 않는다고 알려진 가공된 보석조차 흠집이 나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천천히 사라지면 그것으로 상징적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요. 가치라는 녀석은 그렇게 시시각각 바뀌는 것입니다. 단순 돌에 그치지 않는 것이 수억 년을 거쳐 고고학자의 손을 통해 발굴당하고 이름이 붙으면 가치가 높아지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것도 단순히 그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목숨에 우열이 없다지만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더 많이, 널리 알려져 있는 자의 목숨이야말로 존귀합니다. 선인이 되었든, 악인이 되었든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늘 그런 자들의 죽음입니다. 인류라는 족속들은 대화도 나누지 않은 변방 이웃의 죽음을 통해 울지 않는 집단입니다. 하물며 자신을 스스로 방 속에 유폐시킨 사례는 어떻겠습니까.
고독사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기술이 증진함에 따라 대부분의 삶이 큰 격동기를 맞이하고 특히 의학 분야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에 유독 이상할 정도로 죽음이 많았다고들 합니다. 역병이 돌았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눈에 띄지 않던 주변인들이 하나 둘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한참이 지나 이상함을 느낀 이웃이 문을 열어보면 이미 죽은 사체가 역한 썩은 내를 내며 방안에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여러 방법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일관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죽음에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방치였습니다. 찰나이기에 아름답다는 명제는 전부 거짓입니다. 그들은 모두 추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따라, 죽음에 사유를 묻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모든 목숨이 존귀하다는 말도 심적 여유를 남겨둔 자들의 기만이 담긴 죽은 문장일 뿐입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항상 불합리하며,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합리적입니다. 단정을 지어버린 화자는 어째서인지 모든 것을 알고 받아들였음에도 무감한 표정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정합니다. 단정을 지어버린 ‘나’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가치를 단정 짓고 나서도 슬픈 역력 하나 없는 모습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향한 연민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늘 자신을 불쌍한 인물로 포장하는 주제에 이번만큼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불쌍한 사람은 아니라고 시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감히 속 좋은 이유를 더 붙여보자면 저는 이런 몸이 저에게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르비탈, 펜토바르비탈, 설탕 시럽, 에탄올… 역한 쓴맛이나 고통의 경감 효과를 누린 그것을 목으로 쉬이 넘기면서도 잠드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쳤던 머리가 최후의 순간까지 추하게 사고하고자 발악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면 과연 믿어줄까요. 이성과 감성은 항상 충돌하여 불협화음을 내고는 합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나의 죽음을 스스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부터 발악하고, 결국 저항할 힘조차 남지 못한 순간에서야 옅고도 긴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불완전한 소생. 사실 저는 그것을 이용해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거절했었을지도 모르지만─ 가정은 무의미하니 당장은 제쳐두고, 추한 몰골이라도 다음이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위안삼자고 나 자신과 타협을 본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어떤 심정인지 모르겠지만 당장 저는 그것을 향한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깨어날 당시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운 것입니다. 해방, 당신은 제 삶에 대해 더듬을 사료가 없으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저는 저 자신을 탈피함과 동시에 육신이라는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정해진 배경이나 시나리오, 등장인물이라는 가면 없이도 무엇이든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한없이 기쁜 동시에 서글퍼진 것입니다. 저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으나 막상 저 자신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죽고 나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한스러워서 한차례 더 죽을까도 생각했습니다만, 이런 몸이어도 이상할 정도로 죽음을 생각하면 몸이 무거워져 미수에 그쳤습니다.
저는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정제하여, 최대한 비극적이지 않도록 전할 수 있는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나의 죽음이 비극이 되면 당신들의 슬픔은 배가 됩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닌 이에게 죽음이라는 역병이 돌았다면 역으로 또 익명의 죽음을 향한 슬픔이 지금의 슬픔보다 배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그 죽음에는 의심과 불신, 용기의 재정립과 죄의 유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야 했겠지요. 나는 한 차례의 죽음이라도 신뢰가 있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나 자신조차 이제 납득시킬 수 없었기에, 그저 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흘러내리는 눈물조차 닦아내지 못한 채 옅은 숨만 간간히 내뱉을 뿐이었습니다. 의심암귀야말로 당장의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니까…
모두가 분노할 상대를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있어. 이것이 비단 개인의 잘못이라고 하지는 않을게. 초세계급 또한 사실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니까. 분노의 화살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누구를 의심하고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 배반의 상처와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의 나열 앞에서 얼마나 더 무력감을 느껴야 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 사람은 지쳐갈수록 판단력이 흐려지고 끝내 편리하고 압축된 시선으로 한탄하게 되기 마련이야. 재판은 시선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야. 삶과 죽음이라는 상태만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앞으로의 목적이 되고, 가학자와 피가학자의 죄질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속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사실 그 모든 일련의 사건의 주체가 가학자, 피가학자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고, 동기에도 귀속되어 있지 않으며, 셀이라는 주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습도가 유독 높았습니다. 이곳이 해저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죽음이 낭자하기 때문일까요.
천함과 귀함이야말로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해. 맞아, 당신의 말대로 나 자신을 부정한 순간부터 나는 이미 확정을 지은 거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자신을 연민하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 보상심리라는 것은 실재하니까. 나의 죽음으로 너희의 목숨을 받았다고 생각해 버리면 나의 죽음은 더욱 비참해질 것이고, 그것은 곧 우상화로 이루어져. 그래서는 안 돼. 그런 사상이 삶의 가치를 변질시키기 때문이고, 내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야. 또한,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할 때보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몸을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적합자가 얼마나 되겠어. 난… 그게 가능했어.
네, 그렇습니다. 저는 죽음으로 도피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의 모습이 또 하나의 삶이라는 모순조차 떠안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 자의 산물이 바로 당신 앞에 있는 저라는 존재입니다. 사유하는 한 인간은 살아있는 법인데 어떻게 여전히 사유하고 있는 저 자신의 죽음을 바로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모순의 연속성, 도피. 이 얼마나 비겁한 짓입니까.
그렇습니다, 감히 시인하자면 당신의 말은 하나도 모순이 없습니다. 올곧기에 저의 핵심을 관통하고, 그 예리함의 증인으로 제가 이리도 동요하는 것이겠지요. 거짓이 모순을 낳고 이내 엉키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리고는 합니다. 저는 항상 지독한 피해망상을 열병처럼 앓고 있었기에 이리도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이성적인 동시에 충동적이었고, 이제 돌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돌고 돌아서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와서 무엇이 중요하냐는 겁니다. 후회가 미련이 되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그러한 미련을 해소할 수 없다는 점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저는 항상 해소될 수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 늘 도망쳐 왔습니다. 그것이 제가 제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이자 진실된 사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올바른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이는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이렇게 그릇된 방법으로 사랑을 반복해 온 것입니다. 저는 매일같이 이기적이었으며,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 없었으나 당신이 전면으로 부정하고 나서야 이것이 사랑이 아님을 깨달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미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을 침묵했습니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여러분들은 항상 저의 기본적 상식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는데, 그것은 제 인간관계의 특수성 덕분이라고 생각됩니다. 6년 넘는 시간 동안의 사회로부터의 근절과 완전한 부정, 도피는 저라는 사람을 무던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감각이 둥실둥실 흐릿해지는 것이 영 나쁜 것도 아니었습니다. 충격을 아무리 받아도 담담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보라면 현실성의 부재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에서야 현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나를 봐주는 이들이 있었다고 지금에서야 말합니다. 당신이 절대 늦은 것이 아니지만, 상황이 너무나도 늦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부정에 부정을 곱하고, 또 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한없이 상냥한 사람입니다. 노력을 기울이라는 질책은 곧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며, 내가 온전히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실재함을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천성의 다정함을 타고난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명제이며, 곧 절대적인 법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나는 그 앞에서 감히 자신을 낮추지도,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못하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 하지만 그것이 더는 피하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약속할게. 자신이 진실로 믿어왔던 것을 부정하고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죽음으로 스스로 뛰어들었음을 전면 부정하지 않으면서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내가 올바른 사랑을 해오지 못했음을 시인하고, 그리고 나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인간과 로봇의 상관관계와 윤리를 중시하며 어떻게 나를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것들에 대해서 나는 반드시 생각하고 고려해야만 해. 나는 오래도록 그것을 유기해 왔지만, 네가 그러지 말라고 이렇게까지 단언해 버렸으니까. 진퇴양난, 이라고 표현해야겠죠… 미룰 수 없다고, 당신이 괜찮다고 해버렸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제는 해내야겠죠. 당신 덕분에 쌓인 과제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사유하는 한 인간이 영원한다면, 당신은 저의 생의 증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기꺼웠으며 또한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눈물이 떨어지면 이제 마음속 무언가가 쓸어 내려가듯이 개운해집니다. 그것은 정체와 전혀 다른 감각이라, 조금은 매섭지만 다음에 올 계절을 생각하면 그리 매섭지도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과 다르게 저는 이제 우리에 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는 이름 아래 귀속된 이상 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꺾이더라도, 기억을 통해 살아갈 것이고 사유를 통해 유지할 것입니다.
죽었음에도 우리는 이름 아래 영원합니다. 그러니 절대 지지 않을 것입니다.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입니다, 나 자신, 그리고 당신에게 전하는.
¹ 太宰治、人間失格。
자격은 누가 만들지?
인간이? 로봇이? 그것도 아니라면…
아카기 류노스케는 이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지금에 와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은연중에,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 하나 있었고 아카기 류노스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영혼이니 하는 것들은 전부 거짓이다. 인간은 사고思考하고 행동行動하며 그것을 자유의지自由意志라고 규명한다. 사유思惟할 수 있는 한 인간은 자유롭다! 육신이 자유롭지 않을지라도! 그렇기에 그들은 불구가 됨을 꺼려하면서도 뇌를 기준으로 모든 생명을 영위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귀신이 들렸느니 뭐니 하는 혼령 또한 주체가 자유의지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하는 사고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자유의지가 있는 한 무엇이든 인간과 소통할 수 있으면 인간이 될 수 있다. 당신이 자신의 존재를 이단이라고 규정할지언정, 다름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숨길 수만 있다면 AI도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들에게, AI에게 ‘자유의지’를 온전하게 심어줄 수 있다면… …… ………… 너도 겁에 질렸을 뿐이구나, 니카 프리먼. 안타깝게도.
아카기 류노스케의 눈에서는 더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 자국은 선명했으나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수평선을 보며 답을 깨달은 자처럼 당신을 보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카기 류노스케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다. 구두소리가 선명했다. 붉은 눈이 당신을 집어삼킬 듯이 보고는, 이내 또 소리 내어 웃는 것이다. 여기에 돌아올 자격 따위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존재를 치워버리지 못하는 주제에. 아카기 류노스케는 선인이 아니다. 하지만 악인도 아니었고, 그렇다는 것은 곧 선인도 악인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 하하하, 하… 웃겨서 말이죠, 그렇게 겁에 질린 얼굴로. 저 말이죠, 지는 걸 어지간히─ 싫어해서, 나 자신도 패로 쓸 수 있다면 기꺼이 사용하거든요. 두 걸음, 공기 사이로 상대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는 거리였다. 아프지 않게 죽어서, 이런 몸으로 복귀하는 ‘컨티뉴’ 기능이 뻔히 있는데도─ 여기 있는 전원을 몰살시키는 것보다, 원래 있는 기능을 사용하는 편이 좋지 않아? 영원불멸하지 않을지언정 한 번의 죽음은 여기에서 허용되어 있는데… 있잖아, 이 몸을 만든 자 말이야. 그 자신보다 이해도가 수상할 정도로 높지 않아? 그렇다면, 죽은 자신조차 이전과 이후의 차이를 감히 구분하지 못하는데. 당연히 목숨 따위 가벼워지잖아? 아니야? 여기에서도 존엄을 논하고 싶어? 쓸데없는 죽음은 사양이지만, 필요에 의한 죽음이잖아? 아카기 류노스케는 이상으로 거리를 좁히지는 않았다. 다만 웃으면서 물어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떠올려 봐. 내 시체를 본 순간 말이야. 안도했지? 나도 안도하는 쪽이 되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안타까운 일이지? 자신을 안타깝게 여기는 문장은 또한 지나치게 건조해서, 하나의 극을 보는 듯 기복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간다.
실효를 따져, 감정이 아니라. 그리고 이내 웃음조차 멎는다. 타당한 근거 없이는 어떤 단어로 꾸며도 죽은 문장이 될 뿐이야. ‘도덕적 관념’은 증거가 될 수 없어,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챙길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야. 전쟁 중에 아이 한 명을 살해하더라도,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비도덕적 사고방식을 감히 허용한 무법지대 위에서, 도덕이 무엇이 중요하겠어. 그러니, 부디 알려줄래? 잘못된 내 생각과 다르게, 내가 뭘 하면 너희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방법이 너한테는 있었니? 없었겠지. 그러니 우리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 뿐이다. 다른 방법을 통해 회피할 수 있다고 주장해 버린 이상, 넌 날 비난할 자격이 없어. 방법이 있었음에도 날 살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니까. 있잖아, 그렇게 되면 네가 살인자가 되는 거야. 방관 또한 죄가 되거든.
아카기 류노스케는 드디어─ 두 걸음 물러서 다시 당신을 본다. 붉은 눈을 한 혼백魂魄.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은 그 본질조차 구현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생을 구현해 낸 것이 아닐까, 이 또한 인간의 기술이라면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만든 이의 의도와 다르게 재현된 기술이야 차고 넘쳤으므로. 이런 머리 아픈 질문을 반복할 바에야, 차라리 죽음 따위 없었던 척, 잊어버리는 편이 훨씬 편하지 않니? 귀신이 그렇게 묻는다. 도망치는 것이 편하잖아? 그거면 됐잖아? 상냥하고도, 또한 날카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