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또한 강한 빛 앞에서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렇다면, 사람의 어둡고 편협한 일면 또한 필연적이지 않은가?
하이포시스 오리어. 막연하게 별무리를 연모해야 하는지, 용감하게 빛의 중심으로 뛰어내려야 하는지. 어찌 되었든 그는 목적성 없이 빛을 찾을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관찰과 관망은 한 끗 차이다. 누군가에게 있어 하이포시스는 세심한 곳까지 짚어주는 다정한 관찰자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있어 하이포시스는 모든 것을 보고만 있는 비굴한 방관자일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관찰법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둘을 평생 만족시킬 수 없어 자신만의 성격을 고수할 필요성이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태도를 유지하는 데 큰 노력을 두지 않아도 괜찮았다. ‘성정이 그렇다’고 해야 할까. 비유를 통해 설명해 보자면, 그는 물에 몸을 던지기보다는 수면 위에 유일하게 떠있는 빙하 위에 서있고자 하는 사람이다. 얼어붙은 자리에서 그대로 서있기를 원하는 사람. 얼어붙어 죽을지라도 떠내려가는 수면 위에서 죽고 싶어 하지 않을 사람. 하이포시스 오리어는 천성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어딘가에 휩쓸리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빙하가 녹더라도 말이다.)
다만 마법사이든, 그렇지 않든 결국 지성체는 완전무결하지 않고, 아직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들통날 것이기에 감히 말을 올려보자면, 그의 몸에 베어든 부감, 천시, 하대 따위의 것을 파헤쳐 보면 본질적적 문제의 순수혈통주의사상(강하게 표현해보자면, 레이시즘의 산물)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순수혈통 마법사가 아닌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이는, 차마 가릴 수 없는 저 추악한 오만함을 보아라! 전쟁이 끝났음에도 그에게서 흐르는 피는 우월의 상징으로 여전히 건재하다.) 그리고 당사자는 이를 지적받더라도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구성하는 세계(그러니까, 여기에서 세계는 그가 살아온 ‘가정’이라는 온실을 의미한다.)에서 자신과 머글의 차이는 응당 당연하고, 자신의 비좁은 세상의 이치에 반하고자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은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방관자라고 욕하는 이들은 그의 발치에도 닿지 못하고 그것은 무의미한 울림으로 사라질 것이다. 세상이 변화한 지금에도 말이다. (모두가 쉽게 사람이 바뀌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한다. 항상 그릇된 것은 몸에 새겨져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의견의 선례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그가 머글에 대한 어떤 편협된 시선을 가졌는지, 순수 혈통 우월 의식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그의 뇌에 박혀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언어가 아니라 그와 직접 대면하며 벽을 느껴야만 체감할 수 있을 테니까. 원래 오염된 사고방식을 정화시키기까지의 시간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차별이이 정당방위가 아니라는 사실과 별개로, 마냥 그를 탓하기도 힘들다. 솔직하게 이유를 말해보자면, 개인의 인간성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머글에 대해 은연중에 낮잡아보는 것과 별개로 먼저 누군가에게 싸움을 거는 호전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예를 들어보자. 만일 상대가 먼저 홧김에 그를 상해를 가한다면, 그는 딱히 이렇다 할 물리적 반격을 하지 않는 대신 응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교수님에게 고발할 것이다. 반대로 그의 눈앞에 있는 이가 머글일지라도, 은연중에 깔린 낮잡아보는 시선을 견디면서 차별이 정당함을 이해해 준다면, 그는 기꺼이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며 시혜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우월하고 순수한, 자신의 피와 다른, 혼혈조차도 불순물이 섞였다 배척하는는 일부 과격한 순수 혈통 우월주의 사상의 사람들과 비교해봤을때, 마냥 순수 혈통이 아닌 사람들을 짐승 취급하지 않고 마주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집안이 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해야만 그의 인품을 논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시대적인 차별을 계속해서 답습하는 위선자일 뿐이다.)레이시즘에 의한 동정심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이런 시혜적인 태도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인내와 태생적인 상냥함을 타고나야만 한다. 누군가가 말한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그의 눈은 권력과 야망에 눈멀어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일상과 평화를 사랑하는 온화한 성품만이 비추어진다. 그러나 세계가 좁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왜 세상을 칭송하지 않느냐 묻는다. 정체가 사람에게로부터 희망을 앗아간다고 한다면 그는 그 말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정체된 상황의 맹목적인 신자이기 때문이다.
하등생물을 취급하듯 머글을 홀대하는 이들을 보면 그를 마냥 욕하기에는 모난 곳 없고, 그렇다고 그의 뇌리에 박힌 차별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묻자면 또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다. 태도의 선악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는 방관이 죄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 논해야 하고, 그 기준은 또 어디로부터 비롯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아니라면 그를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부터 잘못되었다. 인류에게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표현과 간접적인 비유들로 표현해 봤자 그가 (자신의 집안을 기준으로 삼은) 안정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완전히 다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자신의 집안과 차별을 얼마나 정당하다고 여기는지, 또 언제부터 이러한 차별을 답습해 왔는지를 감히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불사조 기사단이 이 전쟁을 끝내고 승리를 거머쥐어서, 하나의 세대가 막이 내린 역사적 순간이 지금이라는 사실만이 줄글로 기록되고, 마법의 역사책에 수록되었다는 사실만이 그에게 받아들여져, 막상 그의 차별적인 시선에 개선점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의 차별은 어떠한 한 줌의 악의도 없이 편해지고 싶을 뿐이라는 욕망에서 온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건사고에도 휘말리지 않고, 오로지 평안을 위하여. 비겁하다고 대놓고 힐난하더라도 그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그만이 이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선을 넘어 세계의 평화를 방해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그와의 마찰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득 궁금증이 들 수도 있겠다. 그가 어쩌다가, 우연히, 혹 필연적으로 빛을 처음 보게 된다면, 정체를 자처하던 그가 기꺼이 우물 밖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이에 대해 확답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가 찾아내야 하는 빛이 무엇인지, 아직은 아무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