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RITING/ghostwrite (3)
신청서 대필 샘플 (3)




촛불 또한 강한 빛 앞에서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렇다면, 사람의 어둡고 편협한 일면 또한 필연적이지 않은가?



    하이포시스 오리어. 막연하게 별무리를 연모해야 하는지, 용감하게 빛의 중심으로 뛰어내려야 하는지. 어찌 되었든 그는 목적성 없이 빛을 찾을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관찰과 관망은 한 끗 차이다. 누군가에게 있어 하이포시스는 세심한 곳까지 짚어주는 다정한 관찰자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있어 하이포시스는 모든 것을 보고만 있는 비굴한 방관자일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관찰법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둘을 평생 만족시킬 수 없어 자신만의 성격을 고수할 필요성이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태도를 유지하는 데 큰 노력을 두지 않아도 괜찮았다. ‘성정이 그렇다’고 해야 할까. 비유를 통해 설명해 보자면, 그는 물에 몸을 던지기보다는 수면 위에 유일하게 떠있는 빙하 위에 서있고자 하는 사람이다. 얼어붙은 자리에서 그대로 서있기를 원하는 사람. 얼어붙어 죽을지라도 떠내려가는 수면 위에서 죽고 싶어 하지 않을 사람. 하이포시스 오리어는 천성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어딘가에 휩쓸리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빙하가 녹더라도 말이다.)

 

    다만 마법사이든, 그렇지 않든 결국 지성체는 완전무결하지 않고, 아직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들통날 것이기에 감히 말을 올려보자면, 그의 몸에 베어든 부감, 천시, 하대 따위의 것을 파헤쳐 보면 본질적적 문제의 순수혈통주의사(강하게 표현해보자면, 레이시즘의 산물)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순수혈통 마법사가 아닌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이는, 차마 가릴 수 없는 저 추악한 오만함을 보아라! 전쟁이 끝났음에도 그에게서 흐르는 피는 우월의 상징으로 여전히 건재하다.) 그리고 당사자는 이를 지적받더라도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구성하는 세계(그러니까, 여기에서 세계는  그가 살아온 ‘가정’이라는 온실을 의미한다.)에서 자신과 머글의 차이는 응당 당연하고, 자신의 비좁은 세상의 이치에 반하고자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은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방관자라고 욕하는 이들은 그의 발치에도 닿지 못하고 그것은 무의미한 울림으로 사라질 것이다. 세상이 변화한 지금에도 말이다. (모두가 쉽게 사람이 바뀌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한다. 항상 그릇된 것은 몸에 새겨져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의견의 선례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그가 머글에 대한 어떤 편협된 시선을 가졌는지, 순수 혈통 우월 의식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그의 뇌에 박혀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언어가 아니라 그와 직접 대면하며 벽을 느껴야만 체감할 수 있을 테니까. 원래 오염된 사고방식을 정화시키기까지의 시간은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차별이이 정당방위가 아니라는 사실과 별개로, 마냥 그를 탓하기도 힘들다. 솔직하게 이유를 말해보자면, 개인의 인간성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머글에 대해 은연중에 낮잡아보는 것과 별개로 먼저 누군가에게 싸움을 거는 호전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예를 들어보자. 만일 상대가 먼저 홧김에 그를 상해를 가한다면, 그는 딱히 이렇다 할 물리적 반격을 하지 않는 대신 응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교수님에게 고발할 것이다. 반대로 그의 눈앞에 있는 이가 머글일지라도, 은연중에 깔린 낮잡아보는 시선을 견디면서 차별이 정당함을 이해해 준다면, 그는 기꺼이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며 시혜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우월하고 순수한, 자신의 피와 다른, 혼혈조차도 불순물이 섞였다 배척하는는 일부 과격한 순수 혈통 우월주의 사상의 사람들과 비교해봤을때, 마냥 순수 혈통이 아닌 사람들을 짐승 취급하지 않고 마주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집안이 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해야만 그의 인품을 논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시대적인 차별을 계속해서 답습하는 위선자일 뿐이다.)레이시즘에 의한 동정심일지라도 누군가에게 이런 시혜적인 태도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인내와 태생적인 상냥함을 타고나야만 한다. 누군가가 말한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그의 눈은 권력과 야망에 눈멀어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일상과 평화를 사랑하는 온화한 성품만이 비추어진다. 그러나 세계가 좁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왜 세상을 칭송하지 않느냐 묻는다. 정체가 사람에게로부터 희망을 앗아간다고 한다면 그는 그 말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정체된 상황의 맹목적인 신자이기 때문이다.

    하등생물을 취급하듯 머글을 홀대하는 이들을 보면 그를 마냥 욕하기에는 모난 곳 없고, 그렇다고 그의 뇌리에 박힌 차별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묻자면 또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다. 태도의 선악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는 방관이 죄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 논해야 하고, 그 기준은 또 어디로부터 비롯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아니라면 그를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부터 잘못되었다. 인류에게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표현과 간접적인 비유들로 표현해 봤자 그가 (자신의 집안을 기준으로 삼은) 안정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완전히 다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가 자신의 집안과 차별을 얼마나 정당하다고 여기는지, 또 언제부터 이러한 차별을 답습해 왔는지를 감히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불사조 기사단이 이 전쟁을 끝내고 승리를 거머쥐어서, 하나의 세대가 막이 내린 역사적 순간이 지금이라는 사실만이 줄글로 기록되고, 마법의 역사책에 수록되었다는 사실만이 그에게  받아들여져, 막상 그의 차별적인 시선에 개선점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의 차별은 어떠한 한 줌의 악의도 없이 편해지고 싶을 뿐이라는 욕망에서 온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건사고에도 휘말리지 않고, 오로지 평안을 위하여. 비겁하다고 대놓고 힐난하더라도 그는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그만이 이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선을 넘어 세계의 평화를 방해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그와의 마찰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득 궁금증이 들 수도 있겠다. 그가 어쩌다가, 우연히, 혹 필연적으로 빛을 처음 보게 된다면, 정체를 자처하던 그가 기꺼이 우물 밖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이에 대해 확답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가 찾아내야 하는 빛이 무엇인지, 아직은 아무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신청서 대필 샘플 (2)

 

  외관 서술 

 

 백白색에 가까운 산호색이 투명한 아쿠아마린을 감싸 안는다. 유사색도 보색도 아닌 두 색상은 고명도일수록 제법 인기 있는 색 조합이 된다. 보색을 잘 활용할수록 시각 예술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기 쉬운 만큼 일반인들은 자주 붉은색과 푸른색이 보색이라 착각하는데, 이 둘은 엄밀하게 따지자면 보색의 선상에 놓인 것은 아니다. (중략)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올해 약 10년 차에 접어둔 이 모델의 색상 수용성이다. 이색적인 푸른 눈은 고사하고 얼굴 면적을 차지하는 비늘의 색상을 생각해 보면 (비록 모델의 전체적인 피부색은 연한 빛의 웜톤일지라도) 선홍색보다는 쿨톤에 속한 라벤더 색상이나 약 80%~90%의 색상을 눈 색과 통일한다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아쿠아마린 색상을 채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프네우마의 의상을 담당한 디자이너는 모델을 깊게 고려하지 않는 편이다. 하다못해 허리춤에 있는 날개의 색상에 맞추어 그 흉측한 날개를 숨기지도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이번 의상(전신 이미지 참조.)도 가뿐하게 소화해 냈으며 이는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의상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종족에 반감을 가진 이들을 고려하여 반신을 촬영할 때는 날개까지 담는 일이 잘 없었으나 전신샷을 보면 그 날개가 어우러지지 않을 일이 없다. 로리타 패션에 한해 무궁무진한 자유도를 보장하는 모델을 극찬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번에 공개된 의상은 대외적인 로리타 패션의 이미지에 어긋나지 않게 순백의 딸기 크림을 연상시키는 머리와 통일되는 분홍색과 프릴 소재, 리본 등을 과감하게 사용하였으나, 세간의 시선과 다르게 로리타 패션 또한 평소에도 입고 다닐 수 있을 스트리트 패션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가벼운 천 재질을 사용했다. 특히 상반신 디자인을 넉넉하게 제작하여 화려한 동시에 잠옷과 비슷한 스타일을 차용하여 착용자의 편안함을 보장했다. 앞부분이 트여있어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의상임에도 모델의 다소 화려한 외형을 고려하여 가죽 재질의 흰색 가터 2개를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하여 포인트를 주었으며, 신발은 전체적인 디자인에 걸맞게 분홍색 메리제인 구두를 선택함과 동시에 통일성을 위해 발목 부근에 프릴로 제작된 가터를 추가하여 사랑스러움을 더했다. 늘 두드러지는 머리 장식으로는 전체 컨셉에 맞게 프릴로 된 머리띠에 롭이어 토끼를 연상시키는 장식을 추가하여 부드러운 재질임을 사진으로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소품으로 사용된 가방 또한 분홍색 가죽 재질로 이번 의상에 맞추어 특수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능 서술  (로리타 모델)

 

 프시케를 아는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빚어낸 자손 에로스마저 현혹시킨 (비록 ‘운명의 장난’이 존재하는 일화이지만… 아무렴 뭐 어떤가!) 아름다운 인류가 실존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세이렌 프네우마Pneuma, 고대 신화와 이종족에 관심도 없을지언정 5년 전 혜성처럼 떠오른 이름만큼은 들어본 적 있지 않은가?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의식주(일부 예외는 있을 수 있습니다만…)를 보장받아야 하니 패션이라는 학문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기본적이고, 중에서도 특히 로리타 복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 프시케 페트라키스 라비나(이후 서술에서는 편의상, 활동명인 프네우마라고 칭하겠다. 이쪽 이름이 더 친숙할 테니.)는 이종족이라는 태생적인 한계와 종족의 고정관념을 벗어난 모범적인 선례였다. 사진만으로도 사랑에 빠질 듯한 만인의 첫사랑, 무의식 속 박애주의를 끌어오는 애정의 원형, 아이들의 꿈과 마법, 동경, 그리고 사랑으로 집결되는… 프네우마의 활약은 끔찍하게 야만적인 차별주의자들 손에 길러졌을지라도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게 되면 또래 아이들의 입과 돌려읽는 잡지 안에서 질리도록 보게 되고는 한다. 이번 프네우마 신작 잡지 봤어?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있을 수 있을까! 너무 예뻐서 무심코 옷 주문할 뻔했잖아. 아서라, 프네우마가 입었으니까 천사 같지.

 

 원초적인 보호본능 따위를 불러일으키는 어린 외형은 (비록 돌연변이일지언정) 프네우마의 입지를 만든 핵심 요소로 작용하였다. 10년 전 활동 기간부터 로리타 패션이라는 매니아 층이나 알음알음 파고들법한 분야가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까지 변치 않는 외형으로 수명이 다소 짧은 타 모델을 비참하게 만들 정도이다. 물론 이런 질투와 열등감을 한눈에 받는 프네우마와 동일선상에 존재하는 타 모델도 존재했는데…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쌍둥이여도 ‘고스족의 우상’의 일화가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 생략한다. 모델로서의 활동이 활발할 뿐만 아니라 SNS에서도 팬 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하다. 촬영 때마다 셀카는 기본, 간혹 본인이 직접 찍은 짧은 영상도 업로드되며 가벼운 사담에도 응해주는 모습에서 팬을 향한 애정이 두드러진다. 가장 인기가 많은 게시글은 매일 올라오는 (로리타) 데일리 룩 추천, 스트리트 패션 치고는 벽이 높은 분야임에도 부담스럽지 않도록 엄선한다는 평이 절대 다수인 것을 보면 패션에 대한 감각이 제법 뛰어난 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로리타 패션에 국한되는 사항이다.


 

  공개 성격  절제, 관용, 애정, 다정, 포용, 수긍, 인내 ……… 종종 서늘한?

 

 (명사로서의)모델은 훌륭한 사례, 모범, 본보기 따위의 뜻도 내포하고 있다. 잘 생각해 보자, (역할)모델이라는 단어도 있지 않은가? 여타 다른 동업자와 다를 바 없이 프네우마는 타의 모범이 되는 교과서 같은 이었다. 아름다운 조형에 그 어떤 결함도 불허하는,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인 것처럼 모범을 표방한다. 탐욕 없고 자비롭고 온화하며 따스하다. 누가 말했던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해야 한다. 그것을 의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운 천을 엮듯 유순하게 만들어진 단어의 나열, 배려가 묻어 나오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 시샘하는 이들조차 포용한 성인군자의 지지자는 이타를 종족 특성으로 타고난 이종족 못지않을 것이다. 단순히 잘 깎인 조형의 사진을 ‘사랑스럽다’고 하는 이들이 절대다수겠지만, 그의 인성 또한 아름답다며 입 아프게 칭찬하는 언론이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더욱 굳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십여 년간 낭설을 제외한 그 어떤 인성 논란도 존재하지 않아 골수팬들 사이에서 신성시 여길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 주변에서는 촬영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싫은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성실하게 임하는 모습은 물론이요, 경쟁자라고 할법한 이들에게도 살갑게 대하니 쉽게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이유로 꼽는다. 활동 초반에 질 나쁜 소문이 떠돌기도 하였으나 사랑스러운 외형과 평소에도 두텁게 쌓인 이미지를 통해 궤변이자 낭설임이 금세 들통났으며, 역풍으로 이런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은 업계 퇴출 위기까지 맞이했다 프네우마의 관용으로 겨우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모델은 추후 질투에 눈이 멀어 동업자를 음모했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업계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SNS에서는 프네우마만큼은 인성 관련하여 문제가 터질 일이 절대 없다는 것을 영업 멘트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가진다. 흠 없는 피조물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사회적 교류를 죽을 때까지 행하는 인류(이종족을 포함한 대분류)는 완벽한 유토피아를 살아가기 위하여 사회의 일원으로서 최선을 다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도덕을 학습하며 사회는 이에 어긋나는 이들을 향한 힐난을 아끼지 않는다. 인류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법은 또 어떤가? (현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종족을 향한 차별이 만연하나)반정부적인 일부 예외를 제한 이종족을 위한 사회운동가는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간단하다. 차별 없는 세계가 소위 말하는 유토피아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구성원 하나 당 이상향은 하나씩이지 않은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통합도 마다하지 않은 현 인류일지라도 여전히 평화로운 세계를 갈망한다. 평화로운 세계는 무엇인가? 평화는 무엇인가? 프네우마에게 성격적 결함이 없다는 것은 저명한 사실이지만, 다소 회의적인 시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완벽하다는 것이 더 기이하고 소름 끼치게 여겨진다. 특히 차별주의자들에게 야만적이라 힐난 받는 세이렌의 변종이라는 점이 완전무결한 그 성격이 ‘소름 돋다’ 여겨지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 행실과 무관하게 말이다.

 

신청서 대필 샘플 (1)

 

 

  외관 

 

 대중적으로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아니마는 원형이라 칭할 실질적인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본 종족은 현세에 새로 수면 위로 떠올랐거나 완벽하게 패가망신하여 멸족한 종족의 형태 전부를 이해할 수 있었고 몇십 번 그 다양한 영혼을 탈피의 재료로 사용한 결과 막상 본인은 어떤 종족을 특정 지을 수 없는 지금의 외형이 육안으로 인식된다. 종족 특성이라는 표현이 가장 올바르겠으나 죽음을 기워낸 부작용이라고 한다면 그렇게도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선천적인 요소라는 점을 감안하여 타고난 재능의 범주로 칭하고자 한다면 또한 그래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이해시켜야 하는 대상은 항상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형을 가지고 있어도 인간의 심장에 해당하는 기관이 영적인 존재처럼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형태에 있어 개인차는 분명 존재할지라도) 영혼의 본질이라 불리는 ‘코어’는 분명 실체가 존재하기에 ‘아니마 살인’으로 규명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곧 실체 없는 현상이 종족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지 않은가. 다만 일반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그의 어느 부분이 심장부에 해당하는지 추측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당신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머리─비단 금속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신구’의 형태와 가장 흡사한 보석 박힌 물체이다 보니 이런 표현을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를 본 적 있는가? 들숨과 날숨에 색상이 부여된 적 있는가? 폐의 형태를 추측할 수 있겠는가? 목의 단면은 피와 살로 분류할 수 없는 형태를 지니며, 가슴에 피어오른 촘촘한 꽃이며 탁한 보랏빛에 수놓아진 이름 모를 종족의 상징이 수놓아진 모습은 또 어떻고? 상반신의 근원이 인간의 신체라 추측되나 또 천 아래로 내려온 하반신은 이름 모를 짐승─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사슴 다리 정도일 테지만, 또한 확실하지 않다.─ 과 갑각류의 꼬리를 표방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를 핵심 요소로 특정할 수 없어 진정한 형태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 보니, 어디까지나 편견이자 낭설로부터 비롯된 시각으로 ‘초월적 존재’를 마주했다며 그 존재에 공포심을 호소하기도 한다. 해당 종족의 불합리한 죽음이 해당 종족의 연구의 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다시 넘어와서, 영혼의 공명을 다소 과격하게 해석해 보자면 본래 연결되어 있지 않은 천을 마구잡이로 주워 기워내는 과정이라 표하겠다. 압축해 보자면 부조화’라는 표현이 걸맞다. 영혼의 본질과 무관하게 그것들은 얼핏 한곳에 어우러져 있으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들의 집합체였으니 기이하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시각에서는 그 종족은 형태 없는 신화의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었고, 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짐승이나 ─종족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체가 아닌 하나의 현상, 등의 복잡한 평가를 내어두며 초현실적인 예술 작품을 애써 이해하기 위해 짧은 견문을 더듬는 듯 행동하는 것도 영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말해보자면 이런 배려 아닌 배려는 해당 종족을 대하는 데 그리 유용하지 않다. 아니마를 대하는 데 가장 편한 사고방식은 그저 상상하지 않고 형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저 모든 특성을 하나의 객체로 인식하고, 기원이 무엇인지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것이다. 그 자신조차 특정 부위의 기원을 기억하지 않는데 하물며 타인이 이를 이해할 필요성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당신이 이종족을 분류해야 하는 숙명을 가졌거나, 생명의 기원을 더듬거나, ‘코어’를 파헤쳐 살인을 행할 것이 아니라면 그 외형을 이해하는 행위는 하등 쓸모없는 짓에 불과하다.


  공개 성격 

 

 내뱉은 숨이 순환하듯 그 심성은 유순하게 흘러간다. 나무가 년을 담습할 수록 나이테가 쌓여 촘촘하게 새겨지듯 그 몸에 자애가 켜켜이 쌓인다. 차별을 받는 당사자가 담습 하지 않으니 그 앞에서만큼은 차별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영혼의 공명이라는 개념에 심성의 치유 또한 포함되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이 혼체만큼은 많은 이들이 호감을 가질 요소를 기워둔 것처럼 편안하고 유쾌했으니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모두를 굽어살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이 그에게 감화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아니마가 어디까지나 신이 아니라 종족으로 분류된 이유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많은 영혼을 포식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이 영혼의 태도는 입장에 따라 방관적이게도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하게 모난 이들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말이다.─ 다만 이 ‘방관적’이라는 표현은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 대부분의 평가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사항이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오는 이 막지 않고 다가가는 동시에 원치 않는 이들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나름의 배려로 취급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곱절 이해한다. 애틋한 관계를 동경하고 인정욕 강한 이들에게 자신의 성격이 독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이해한다. 그는 늘 일부 자신을 고깝게 보는 이들의 생각을 반박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평가가 격하되는 것보다 괜한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더 싫어했으므로. 유년기의 영혼이 본능적으로 거부하기라도 한 듯 여러 영혼을 기워낸 이 형태는 다양한 것을 수용했으나 분쟁만큼은 극도로 꺼려 했다. 많은 사유를 들 필요성은 없다. 생각해 보아라. 평화의 대척점에 놓인 분쟁이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이리 강조하는 이유는 그런 사유를 제쳐두고도 강조할 만큼 분쟁을 싫어하는 성향이 짙기 때문이다. 분쟁을 섬멸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자신의 일이 아닐지언정 중재자로 나설 준비가 되어있다. 영혼에 새겨진 세월만큼의 지혜를 나누어 분쟁을 종결시키려고 한다. 광적인 것은 전혀 아니나 타인을 부정하지 않는 평소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태도임은 분명하다. 동시에 이는, 하나만 유의하면 이 영혼과 무난하고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평온한 영혼 앞에서 의미 없는 논쟁을 하지 말 것. 

 


  기타 

 

 죽음이라는 개념과 무관했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초연했다. 관계의 깊이를 막론하고 부고 앞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모습은 비교적 생이 짧은 이들에게 있어 섬뜩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삼백 년이라는 삶을 살아오면서 목격한 죽음의 횟수를 가늠해 보면 순리를 순응해야만 버틸 수 있지 않겠는가. 예외가 있다면 죽음에 행위자가 개입한 사례이다. 살인, 그리고 자살. 생이라는 것이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지만 그것이 경시輕視의 까닭이 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행위를 돌이킬 수 없다지만 생에 걸친 만회의 기회조차 끊어내는 것은 영혼조차 씻을 수 없는 중죄이다. 그는 타인을 이해하는 만큼 타인의 가능성을 보고자 했다. 흙으로 돌아간 육신이 꽃의 거름이 되는 자연의 순환처럼 개인에게 부여된 삶이 언젠가 의미를 가지기를 기대하고, 소망하기를 바라는 이었다. 그것만이 모든 죽음에 초연한 이를 흔들리게 만든 강풍의 연유이며 오래도록 무뎌진 감각이 잠시간 되살아나는 사유이다.

 

 죽음으로부터 기여 받아 살아가는 종족이 감찰의라는 직업을 가진 이유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다. 의외로 해답은 바로 그곳에 있었는데, 죽음으로 성장하는 자신 또한 그 죽음에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삶으로 치환하면 헌신적인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종족의 성장 방식인 ‘영혼을 흡수한다’는 사실에 꽂혀 업무 중 사체로부터 영혼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냐는 악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영혼은 대부분 죽은 장소에 남아있으니 시체를 후송 받아 조사하는 자신은 그럴 수 없다며 해명한다. 이는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의 어두운 일면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 물론, 그 성격상 분쟁을 막기 위해 해명한 것과 별개로 사적인 원한을 가지지는 않았다. 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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