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志が存在する限り、人間は永遠である。

 

 

 

 

 

아카기 류노스케는 이 난이 웃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에스퍼니 뭐니, 농담 삼아서 떠들고 다니지만 사실 그 자신은 타인을 향한 몰이해를 충분히 고려하고 이해하며, 강요하지 않는 자였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성을 해치는 일이니까. 타인에게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 아카기 류노스케는 이러한 행위를 제3의 살해, 그러니까 '정서적 살해'라고 규명했다. 껍데기에 불과한 삶은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사회적 죽음의 다른 형태이자, 간혹 육체적 죽음보다 끔찍하게 다가오고는 한다. 아카기 류노스케의 심장부는 바로 그 정서적 살해를 향한 견해로부터 비롯되어 가지를 뻗는다. 

 

그러므로 아카기 류노스케에게 사유보다 상위의 개념, 그러니까 '의지'라는 것은 인간의 근원지이다.

 

아카기 류노스케가 믿는 가능성은 AI라는 몸체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귀속할 수 없는 영적인 것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의지라는 철학적 개념 아래 인간은 영원할 수 있다 믿었다. 가상의 것에 푹 빠져있었던 영향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의지라는 것 없이 평가를 그대로 수용하며 남들에게 떠밀리고 비난을 감수하며 살아온 생애를 더는 인정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카기 류노스케는 완전히 AI를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으나 화려하게 망해먹었다. 낙담 속에 사리분별도 하지 못하고 부정하다가도 긍정하기를 반복, 후회를 쌓아오며 아무것도 없었던 생애를 돌이켜 보자 죽기 전보다 더욱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카기 류노스케의 믿음은 바로 경험에 있었다. 그렇기에 가능성을 부정하고자 입을 열었으나, 이내 다물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난제의 답은 끊임없이 당신이 생각해야 하며, 자신이 납득해야 한다. 타인의 답지를 모방한다고 이해되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사상을 내세우는 것은 그 본질을 흐리게 만들 뿐이다. 다만 당신이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간단하다, 당신이 친구라는 이름을 나에게 붙여주지 않았던가. 

 

응, 앞으로의 삶을 괴로움 속에서 보내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할까요.

 

아카기 류노스케는 미신을 믿지 않으나 약속은 중요시했다. 자신의 언어에 책임을 지고 거짓됨 없이 살아가고자 했다. 거짓말보다 침묵이 익숙했으나, 빈말로 상처 입히는 것이 사실을 명시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속일 자신이 없어 한없이 솔직하고 투명해진다. 타인이 약속을 어겨도 괜찮다, 하지만 자신만큼은 어기지 않으려고 했다. 타인을 향한 약속은 자신을 향한 약속이기도 했다. 또한 소망을 담기도 했다. 이번에는 전적으로 후자였다.

 

누구라도 죽음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동시에 후회와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귀천이 없다는 말 또한 동의한다. 목숨에 가치를 만드는 건 바로 자신이니까. 위업과 무관하게, 가치는 본인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누나의 사상이 주입된 것이어서 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당신이 물어보았다면, 아카기 류노스케는 기꺼이 동화된 사상 또한 당신의 것이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분별할 수 없으나 마음이 이끌고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사상이 될 수 있다. 모방에 불과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면 사람은 한없이 선해질 수 있다. 아카기 류노스케는 인간의 천성과 변화를 동시에 믿는 자였다. 변하지 않는 가치와, 변하기에 아름다운 가치. 모든 것을 믿었다.

 

난 씨는 어떤가요? 자신을 AI로 생각하더라도, 생존본능이 여전하다면 저는 여기에서 벌어진 죽음을 외면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AI가 아닌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고, 그렇게 여긴다면 저 또한 당신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도 괜찮다고 말해드릴게요. 입력된 것이면 어때요, 입력된 것이 존재의 숙명이라면 우리는 삶을 허락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거 아닐까요? 

 

당신이 AI로 남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많이 외로울 것 같아서요. 

 

안 그런가? 쓸쓸함은 누구에게나 있다. 가식을 떨며 사람을 통해 해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면의 호소를 통해 해소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아카기 류노스케는 어느 쪽인지를 묻는다면, 당신이면 충분하다고 답하겠다. 선천적으로 사람을 기피하면서 모순적이게도 타인을 통해 활력을 얻는 자라고 말하겠다. 그러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가식을 떨지는 않는다. 그것을 통해 얻은 인간관계로는 여전히 자신은 궁핍할 것이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난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쓸쓸함조차 느끼지 않는가, 혹은 외면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 순간을 헤쳐 나가는가? 혹은, 무력하게 쓸려가는가? 무수히 많은 가정은 무의미하다.

 

게임성 도박이라, … 실패가 곧 좌절이 될 필요는 없지, 우리는 그것을 기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결말을 정하는 힘 또한 전능한 신 아닌 우리에게 있지. 결말에 대해서 신도 감히 우리를 농락할 수 없을 거야, 믿음이란 그런 거니까. 믿음은 반드시 보답받을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믿자. 우리가 그렇게 만들자.

 

할 수 있어, 혼자가 아니니까. 

무모하더라도, 같잖은 희망론이 될지라도, 우리의 결말은 분명 해피 엔딩일 것이라고─ 그렇게 선언한다.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