告白

 

 

 

 

 

화가 났다기보다는…  허무했다고 해야 할까, 인류에게 질렸다고 해야 할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감정을 쏟을 정신도 없었으니까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에 여유가 나더라도 감정을 쏟아낼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숨을 쉬는 것이 전부인. 삶이라기에는 끝도 없이 비어있던 인생. 본능처럼 사람을 갈구해도 군중 속에 외로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을 향한 모든 정이 두려웠다. 계절 단위 이하로 만나고 떠나기를 반복할지언정 최대한 가벼운 인간관계만을 추구하고 그마저도 벽을 세우며, 제 안의 사람이라고 포용해도 타인이라고 벽을 치고 살아오기를 반복. 자신에 대한 것을 마지막에 끊어낸 것도 결국 타의에 의해 떠밀렸을 뿐인. 타인을 진심으로 위하지 않지만 동시에 이기적이지도 않은. 모순을 떠안은 생애. 그러니 유일했다는 결론에 쉽게 답할 수 없어져서.

다들 원했으니까…,
그러니까, 떠밀려서.

타인이 아닌 군중에 의해 쉽게도 휩쓸렸다고 그렇게 고해한다. 아니, 고해라는 말은 지나치게 무겁고 또한 우습게 여겨진다. 이건 그저, 미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고백告白이다. 당신이 살아온 생애는 분명 의심할 여지없이 고결하지만 나는 당신을 신성시하지 않았으므로 종교적 의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백.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일을 생이 멎고 나서야 할 수 있다니, 세상에 다시없을 겁쟁이인 것이 분명하다. 되물었다.

이것 또한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인가요?
나의 도피처라고 말할 수 있나요?
외면하기 위한 유예인가요?

자신을 해독하는 것도 제법 버거운 일이다. 아니, 정정한다. 타인의 핵심을 꿰뚫는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것은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 생전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까닭이다. 이미 죽어 없어진 생애를 다시 더듬어 가면서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노력 따위에 파묻혀 이기적이게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이타심 또한 이기심의 일종이라고 세간에서는 말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월등한 불량품. 누가 나를 그렇게 표현했더라,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학우의 단어가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 인정하자. 태생적으로 정서적 결함을 가졌다. 그것이 사회성에 대한 학습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인격장애를 앓는 이들이나, 자폐 성향을 가지고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나의 격리는 명백하게 자의였다. 

그러나, 자신을 격리하는 행위를 포기하고 지금 여기에 와서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도 늘었다. 후회하지 않을 미련 없는 삶이 아니라 후회하는 마음으로 적셔져 다행이라고 동시에 여기게 된다. 과분할 수준의 결여의 충족, 동시에 되돌려 달라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속인다. 드디어 미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참 성급하게도 죽음을 택해버려서. 절대 말할 수 없지만 곱씹을수록 후회가 더해질 뿐이라… 죽음을 되돌려 달라고, 이런 몸으로나마 살아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인간이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이유였다. 되돌아간다고 해도 바뀔 수 없는 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의 찬란한 재능과 자신 사이에 차마 극복할 수 없는 경계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살고 싶었어, 소중해졌으니까. 하지만 너희가 없는 인생에 과연 의미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 의미는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는 말했어, 차라리 다 같이 심해 속에서 침몰하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다고. 
누군가는 말했어, 이 몸체를 이용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누군가는 말했어, 죽음을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고.
누군가는 말했어, 나는 분명 살고 싶어 했다고.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면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겠죠.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후회할 수 있으니까. 

나의 생애에 의미를 만들어 준 주체는 당신을 포함한 여기 모든 사람들이니까. 나의 죽음이 숭고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나는 인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희생이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죽음은 도피의 수단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몇 번이고… 미련이 남을지라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괜찮다, 후회 없는 죽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삶이 소중해졌다는 말 또한 기꺼이 긍정했다. 응, 억지로 다시 만들어진 삶이라도 살아가고 싶어. 타인이 보기에 미련하고 볼품없게 보일지도 몰라, 그래도 살아갈 거야. 

그것이 인생人生이니까.

사유는 곧 살아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며, 감정은 곧 사유하는 자들의 전유물이다. 그러니 알고리즘으로 입력될 수 없는 희로애락을 가진 자신을 감히 AI로 정의할 수는 없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모방에 불과하여 입력한 데이터베이스라는 말에 나는 기꺼이 부정하겠다. 몸체는 다시 만들어졌더라도 나의 삶은 인조적으로 주입된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모든 감각은 오로지 내 고유의 것이다. 재탄再誕이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나의 형태는 이미 끝이 맺어진 삶의 연장선이며, 다시 쟁취한 기회이다. 나는 이 삶을 다시는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의심을 반복하더라도, 참극을 눈에 온전히 담아야 하더라도.

엇나가지 않아. 확실하게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의 이기심보다 상위에 있는 것은 여전히 도덕적 행위에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옳은 선택인지 끊임없이 고민했어. 윤리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회생한 나 자신을 어떻게 규명할지. … ……그러나 내가 도덕적 규범을 어긴다면 모방 이상의 것을 구현한 이 몸체를 기꺼이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욕심에 불과하지만 감정이 있는 한 나는 끝내 부정할 수 없다. 입력된 반응에도 쉬이 정 붙이고 슬퍼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살아온 생애를 긍정하며 나 자신을 더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통상적 도덕적 윤리에 반하더라도.

응, 이론은 자신 있어. 자료도 풍부하고. 특히 의학 지식에 대한 부분은… 인정하기 싫지만, 지하 1층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정보의 질만큼은 절대 무시할 수 없어. 여기에서 여러 방면으로 계속 활용되었겠지. 여전히 이런 몸이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 정확히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어느 부분에서 참고를 했는지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짓으로 잠시 문을 바라보기는 했으나, 다시 시선이 당신에게로 관성처럼 돌아왔다.

 

팔이 움직이고 감각이 있다면… 분명 재생될 거라고 생각해. 어디까지 ‘진짜 같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감각이 있다는 건 우선 신경세포라고 불릴만한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니까. 따라, 말했던 재생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지만, 감각 자체가 마비되거나 아예 절단된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 추리를 본인이 직접 들었으면 무서워했을 것 같네… 그래서 절대 안정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가끔 거짓말도 하는 것일까?

 

애초에, 그런 환자를 상대라면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또한 가벼운 어투였다. 굳이 이러한 지론 따위의 것을 알려주며 상대를 겁주는 것보다는 시간에 따라 육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듯이 새로운 몸의 구성체계나, 원천, 에너지 자원이 되는 몸속 생체활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은가. 연료를 필요로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땅한 에너지를 수급할 수 있는 다른 충전식 기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잠수함 자체가 AI의 원동력일 극단적인 예시안 또한 나올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고실험을 잠시 거쳤다가, 본인 또한 어렵다는 말에 가만 시선을 맞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연다.

의심하는 행위 자체가 상대를 믿고자 하는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신뢰와 의심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아예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믿기 위해서 의심을 한다. 믿음 없이 이루어지는 의심은 더는 의심이 아니라 단순한 마녀사냥에 불과하니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편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타인을 의심하는 것은 타인을 믿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온다. 그러니 매 순간 우리는 타인을 믿기 위해서 이 힘든 의심을 계속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폭풍우 같은 파란이 지나가면.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