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録。

 

 

 

 

 

恥の多い生涯を送ってきました。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自分には、人間の生活というものが、見当つかないのです。 ¹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까닭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은 죽음으로 삶의 이유를 만듭니다. 꽃은 멎기에 아름답고 빛의 산란은 찰나이기에 아름답습니다. 무릇 인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아름다움은 늘 가치를 잃습니다. 결코 깨지지 않는다고 알려진 가공된 보석조차 흠집이 나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천천히 사라지면 그것으로 상징적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요. 가치라는 녀석은 그렇게 시시각각 바뀌는 것입니다. 단순 돌에 그치지 않는 것이 수억 년을 거쳐 고고학자의 손을 통해 발굴당하고 이름이 붙으면 가치가 높아지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것도 단순히 그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목숨에 우열이 없다지만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더 많이, 널리 알려져 있는 자의 목숨이야말로 존귀합니다. 선인이 되었든, 악인이 되었든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늘 그런 자들의 죽음입니다. 인류라는 족속들은 대화도 나누지 않은 변방 이웃의 죽음을 통해 울지 않는 집단입니다. 하물며 자신을 스스로 방 속에 유폐시킨 사례는 어떻겠습니까.

 

고독사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기술이 증진함에 따라 대부분의 삶이 큰 격동기를 맞이하고 특히 의학 분야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에 유독 이상할 정도로 죽음이 많았다고들 합니다. 역병이 돌았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눈에 띄지 않던 주변인들이 하나 둘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한참이 지나 이상함을 느낀 이웃이 문을 열어보면 이미 죽은 사체가 역한 썩은 내를 내며 방안에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여러 방법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일관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죽음에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방치였습니다. 찰나이기에 아름답다는 명제는 전부 거짓입니다. 그들은 모두 추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따라, 죽음에 사유를 묻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모든 목숨이 존귀하다는 말도 심적 여유를 남겨둔 자들의 기만이 담긴 죽은 문장일 뿐입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항상 불합리하며,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합리적입니다. 단정을 지어버린 화자는 어째서인지 모든 것을 알고 받아들였음에도 무감한 표정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정합니다. 단정을 지어버린 ‘나’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가치를 단정 짓고 나서도 슬픈 역력 하나 없는 모습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향한 연민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늘 자신을 불쌍한 인물로 포장하는 주제에 이번만큼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불쌍한 사람은 아니라고 시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감히 속 좋은 이유를 더 붙여보자면 저는 이런 몸이 저에게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르비탈, 펜토바르비탈, 설탕 시럽, 에탄올… 역한 쓴맛이나 고통의 경감 효과를 누린 그것을 목으로 쉬이 넘기면서도 잠드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쳤던 머리가 최후의 순간까지 추하게 사고하고자 발악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면 과연 믿어줄까요. 이성과 감성은 항상 충돌하여 불협화음을 내고는 합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나의 죽음을 스스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부터 발악하고, 결국 저항할 힘조차 남지 못한 순간에서야 옅고도 긴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불완전한 소생. 사실 저는 그것을 이용해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거절했었을지도 모르지만─ 가정은 무의미하니 당장은 제쳐두고, 추한 몰골이라도 다음이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위안삼자고 나 자신과 타협을 본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어떤 심정인지 모르겠지만 당장 저는 그것을 향한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깨어날 당시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운 것입니다. 해방, 당신은 제 삶에 대해 더듬을 사료가 없으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저는 저 자신을 탈피함과 동시에 육신이라는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정해진 배경이나 시나리오, 등장인물이라는 가면 없이도 무엇이든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한없이 기쁜 동시에 서글퍼진 것입니다. 저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으나 막상 저 자신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죽고 나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한스러워서 한차례 더 죽을까도 생각했습니다만, 이런 몸이어도 이상할 정도로 죽음을 생각하면 몸이 무거워져 미수에 그쳤습니다.

 

저는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정제하여, 최대한 비극적이지 않도록 전할 수 있는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나의 죽음이 비극이 되면 당신들의 슬픔은 배가 됩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닌 이에게 죽음이라는 역병이 돌았다면 역으로 또 익명의 죽음을 향한 슬픔이 지금의 슬픔보다 배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그 죽음에는 의심과 불신, 용기의 재정립과 죄의 유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야 했겠지요. 나는 한 차례의 죽음이라도 신뢰가 있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나 자신조차 이제 납득시킬 수 없었기에, 그저 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흘러내리는 눈물조차 닦아내지 못한 채 옅은 숨만 간간히 내뱉을 뿐이었습니다. 의심암귀야말로 당장의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니까…

 

모두가 분노할 상대를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있어. 이것이 비단 개인의 잘못이라고 하지는 않을게. 초세계급 또한 사실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니까. 분노의 화살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누구를 의심하고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 배반의 상처와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의 나열 앞에서 얼마나 더 무력감을 느껴야 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 사람은 지쳐갈수록 판단력이 흐려지고 끝내 편리하고 압축된 시선으로 한탄하게 되기 마련이야. 재판은 시선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야. 삶과 죽음이라는 상태만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앞으로의 목적이 되고, 가학자와 피가학자의 죄질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속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사실 그 모든 일련의 사건의 주체가 가학자, 피가학자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고, 동기에도 귀속되어 있지 않으며, 셀이라는 주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습도가 유독 높았습니다. 이곳이 해저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죽음이 낭자하기 때문일까요. 

 

천함과 귀함이야말로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해. 맞아, 당신의 말대로 나 자신을 부정한 순간부터 나는 이미 확정을 지은 거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자신을 연민하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 보상심리라는 것은 실재하니까. 나의 죽음으로 너희의 목숨을 받았다고 생각해 버리면 나의 죽음은 더욱 비참해질 것이고, 그것은 곧 우상화로 이루어져. 그래서는 안 돼. 그런 사상이 삶의 가치를 변질시키기 때문이고, 내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야. 또한,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할 때보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몸을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적합자가 얼마나 되겠어. 난… 그게 가능했어.

 

네, 그렇습니다. 저는 죽음으로 도피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의 모습이 또 하나의 삶이라는 모순조차 떠안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 자의 산물이 바로 당신 앞에 있는 저라는 존재입니다. 사유하는 한 인간은 살아있는 법인데 어떻게 여전히 사유하고 있는 저 자신의 죽음을 바로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모순의 연속성, 도피. 이 얼마나 비겁한 짓입니까.

 

그렇습니다, 감히 시인하자면 당신의 말은 하나도 모순이 없습니다. 올곧기에 저의 핵심을 관통하고, 그 예리함의 증인으로 제가 이리도 동요하는 것이겠지요. 거짓이 모순을 낳고 이내 엉키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리고는 합니다. 저는 항상 지독한 피해망상을 열병처럼 앓고 있었기에 이리도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이성적인 동시에 충동적이었고, 이제 돌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돌고 돌아서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와서 무엇이 중요하냐는 겁니다. 후회가 미련이 되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그러한 미련을 해소할 수 없다는 점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저는 항상 해소될 수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 늘 도망쳐 왔습니다. 그것이 제가 제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이자 진실된 사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올바른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이는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니 이렇게 그릇된 방법으로 사랑을 반복해 온 것입니다. 저는 매일같이 이기적이었으며,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 없었으나 당신이 전면으로 부정하고 나서야 이것이 사랑이 아님을 깨달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미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을 침묵했습니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여러분들은 항상 저의 기본적 상식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는데, 그것은 제 인간관계의 특수성 덕분이라고 생각됩니다. 6년 넘는 시간 동안의 사회로부터의 근절과 완전한 부정, 도피는 저라는 사람을 무던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감각이 둥실둥실 흐릿해지는 것이 영 나쁜 것도 아니었습니다. 충격을 아무리 받아도 담담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보라면 현실성의 부재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에서야 현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나를 봐주는 이들이 있었다고 지금에서야 말합니다. 당신이 절대 늦은 것이 아니지만, 상황이 너무나도 늦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부정에 부정을 곱하고, 또 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한없이 상냥한 사람입니다. 노력을 기울이라는 질책은 곧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며, 내가 온전히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실재함을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천성의 다정함을 타고난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명제이며, 곧 절대적인 법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나는 그 앞에서 감히 자신을 낮추지도,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못하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그것이 더는 피하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약속할게. 자신이 진실로 믿어왔던 것을 부정하고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죽음으로 스스로 뛰어들었음을 전면 부정하지 않으면서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내가 올바른 사랑을 해오지 못했음을 시인하고, 그리고 나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인간과 로봇의 상관관계와 윤리를 중시하며 어떻게 나를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것들에 대해서 나는 반드시 생각하고 고려해야만 해. 나는 오래도록 그것을 유기해 왔지만, 네가 그러지 말라고 이렇게까지 단언해 버렸으니까. 진퇴양난, 이라고 표현해야겠죠… 미룰 수 없다고, 당신이 괜찮다고 해버렸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제는 해내야겠죠. 당신 덕분에 쌓인 과제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사유하는 한 인간이 영원한다면, 당신은 저의 생의 증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기꺼웠으며 또한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눈물이 떨어지면 이제 마음속 무언가가 쓸어 내려가듯이 개운해집니다. 그것은 정체와 전혀 다른 감각이라, 조금은 매섭지만 다음에 올 계절을 생각하면 그리 매섭지도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과 다르게 저는 이제 우리에 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는 이름 아래 귀속된 이상 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꺾이더라도, 기억을 통해 살아갈 것이고 사유를 통해 유지할 것입니다.

 

죽었음에도 우리는 이름 아래 영원합니다. 그러니 절대 지지 않을 것입니다.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입니다, 나 자신, 그리고 당신에게 전하는. 

 

 

 

 


¹ 太宰治、人間失格。

 

 

yunicorn